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바르트 (문단 편집) ====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과 헤르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유주의를 신봉하였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지성인 93인이 독일 황제의 전쟁정책이 기독교 문명 보호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건이 있었는데, 하르낙이 이것을 기초하였고, 헤르만, 제베르그, 라데등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바르트는 그들이 "지성인의 선언"에 서명한 것은 잘못된 신학과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정치적 이념과 신학은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바르트는 더이상 그들의 입장을 따를 수 없었고 그것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종언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바르트가 남긴 글이다. 본문을 보면 '신들의 황혼', 즉 북유럽 신화의 세계 종말인 '[[라그나로크]]'를 경험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이 표현을 사용할 정도면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전 세계 앞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베트만-홀베크]](Bethmann-Hollweg)의 전쟁 결정에 찬성하는, 그야말로 처참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명서에 서명한 지성인들의 명단에 나의 독일인 스승들의 이름이 거의 다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자유주의|하르낙, 헤르만, 라데, 오이켄 등]]이 이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았을 때", 어떻게 종교와 학문이 [[제1차 세계 대전|"모조리 지성의 42cm 대포"로 둔갑하는지]]를 보았을 때, "나는 이른바 '''[[라그나로크|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경험했다." > >"이제 나는 독일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한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전쟁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패했다고 느꼈으며, 그 실패로 인해 그들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나락에 떨어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윤리적 실패"는 '''"그들의 성서 주석학과 교의학의 전제도 올바른 상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철저하게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 곧 성서 주석, 윤리, 교의학, 설교의 세계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의 진실성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 >"그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정체가 드러난 그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그]]다!" >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계시와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 >- 카를 바르트, 글의 순서대로 "W. Spoedlim 에게 쓰는 편지. 1915년 1월 4일", "뮌스터 대학교 개신교 신학과 기념앨범 자서전적 텍스트(Autobiographische Texte). 1927", "알베르트 셰델린 기념 문집 회고. 1950", "에드워드 트루나이젠과의 서신교환. 1921-1930년. 1974년 발견" 中 에서 추출해낸 그의 개인적 심경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